강남까지 가서 상담만 세 시간 받고 왔는데

강남까지 가서 상담만 세 시간 받고 왔는데

어쩌다 보니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보다 안 한 친구들이 더 많아졌고, 나도 나이가 차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결혼정보회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결정사인가 싶어서 비웃었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정말 내 이야기인가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는 덜컥 겁부터 났다. 울산결혼정보회사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오는 곳들은 뭔가 지역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괜히 서울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결국 지난 주말, 큰맘 먹고 강남에 있다는 몇 곳을 예약해서 다녀왔다.

상담실의 분위기와 낯선 긴장감

강남 한복판에 있는 빌딩 숲 사이로 들어갔는데, 1층 로비부터 뭔가 묘하게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상담 예약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친절한 커플매니저분이 웃으며 맞이해주셨는데, 사실 그 웃음이 어딘가 비즈니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담실 안은 조용했고, 따뜻한 차가 나왔는데 긴장해서인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내 연봉, 부모님 직업, 학벌 같은 걸 묻는 질문지들을 채우면서 내가 지금 무슨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기 위해 스펙을 나열하는 건가 싶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담 시간은 원래 한 시간 정도라고 했는데, 분위기에 휩쓸려 이야길 하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상류층 전문이라던 그곳의 현실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결혼정보회사라고 홍보하는 곳이었는데, 정회원 서비스 만족도가 98%라는 문구를 상담실 앞 액자에서 보았다. 4명의 커플매니저가 전담 배정되는 VVIP 시스템이라니, 듣기엔 참 화려하고 든든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 가치관이나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그분들은 내 마음보다 내 ‘조건’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1년에 몇 번 만남을 주선하는지, 추가 비용은 얼마인지, 성혼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같은 실무적인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압박이 조금씩 밀려왔다. 가입비가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 단위까지 언급되는데, 이게 정말 평생의 짝을 찾는 과정인지 아니면 비싼 멤버십 클럽에 가입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허탈함

상담을 마치고 나와서 강남역 앞 카페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5년 뒤의 나를 생각해보면 결혼은 해야 할 것 같고, 지금 만나는 사람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나중에 더 큰 후회로 남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사실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는 차비랑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울산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왕복 5시간은 걸리니까. K8 노블레스 등급 차량을 보면서 결혼하면 SUV로 바꿔야 하네 마네 고민하던 친구 놈 생각이 났다. 결혼 정보 회사에 큰돈을 쓴다고 해서 내 인생이 180도 바뀔까, 아니면 그냥 조건 좋은 사람과 서류상으로 만나는 게 다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선택지 앞에서 남는 찝찝함

상담해주신 매니저분은 그날 당장 결정해야 혜택이 많다고 은근히 압박하셨지만, 결국 아무것도 사인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 왠지 여기서 결정하면 내 가치가 이 가격표에 매겨지는 것 같아서 싫었던 것 같다. 제이노블이나 퍼플스 같은 곳들을 언급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노력하셨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거울을 보니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요즘은 비혼도 많다는데, 그냥 다들 이렇게 결혼하는 걸까. 아직도 가입 신청서를 써서 보낼까 말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냥 소개팅이나 더 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그날 가져온 팸플릿은 아직도 현관문 신발장 위에 방치되어 있다.

댓글 1
  • 강남 상담받고 돌아와서 보니, 마치 높은 가격의 좋은 물건을 사놓고 후회하는 느낌이네요.